모르겠어요.
아주 어릴 때부터 그런 순간이 있었지요,
아주 커다란 파도 같은 것이 밀려와서
나를 덮치고 지나가는 순간.
나는 아주 작은 아이였고
내가 서 있는 곳은 바닷가였으므로
언제나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파도를 고스란히 온몸으로 맞아야만 했던 순간.
하지만 나는 작고 파도는 커서
하얀 모래밭에 나동그라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지요.
나는 모래의 까끌까끌한 맛을 느끼며
파도가 다 지나갈 때까지 투명하게 부서지는 거품, 너머의 푸른 하늘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지요.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지요.
내가 그렇게 넘어져 있을 때
누군가 나를 발견하고 다가오면
나는 자꾸 웃고 싶고 자꾸 울고 싶고
오래 깨어 있고 싶고 그냥 잠들고 싶고
그대로 모든 게 거품과 함께 사라지고 증발될 것 같아
조금이라도 순간을 쥐고 싶어
당신의 손을 잡고 싶었던 것인데
다 지나가더군요.
다 녹아내리고
다 무너지고
다 변하고
다 떠나더군요.
그리고 혼자 남은 나는
빈손으로
빈 마음으로
혼자 남더군요.
많은 세월이 흐르고
나는 그 바닷가를 오래전에 떠나왔지만
어쩌다 사랑이 나를 넘쳐 흘러갈 때
그래서 거품이 눈물이 안개가 내 눈을 멀게 할 때
맨마음으로
당신에게 말하고 싶었으나
저기, 지금, 사랑이,
나를 넘쳐 흘러가고 있어요, 라고
그 대신 나는
눈을 꼭 감고 숨을 틀어막고 소리를 죽이죠
나의 모든 흔적을 숨기려고 안간힘을 쓰죠
그래도 그게 어디 되나요.
어쩌다 터져 나오는 것들은
너무나 밝아서 너무나 뜨거워서
자꾸만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 것들이어서
아무리 애를 써도 그렇게 넘쳐흐르는 것들이어서
어떤 이들이 나에게서 차가움을 보는 것은
내가 살아야 하기 때문인 거죠.
사랑이 나를 넘쳐 흘러갈 때
저 혼자 흘러흘러 가버릴 때
나도 데려가달라 말할 수 없는 나는
혼자 남아야 하는 나는
저기, 지금, 사랑이,
넘쳐 흘러가고 있어요,
보이나요?
당신의 눈은 사랑을 좇고
나는 어둠에 싸여 있어요,
하고 말도 못하고
아무려면 어떤가요.
눈을 뜨면
세계,
사랑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
지루한 세계,
안전한 세계이니
그러다 또 문득 심장이 죽어버린 것 같은 날에는
미친 듯 달아오르는 마음이 그리워지는 날에는
나도 모르게 그곳으로 가겠죠.
그 바닷가로.
사랑이,
무시무시한 사랑이,
나를,
넘쳐,
아주 멀리,
흘러가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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