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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밑줄

지성에서 영성으로/이어령


그러나 등 뒤에서 억누르는 쌀자루의 무게보다도 더 참담했던 것은 내가 목표로 삼고 기를 쓰며 걸어가고 있는 내 창문의 불빛이었지요. 별빛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희망의 별도, 동방 박사를 인도한 구원의 별도 아니었지요.

물건을 많이 들여놓을수록 내 몸이 쉴 빈 자리는 그만큼 사라지게 된다는 평범한 상식을 그날에서야 깨달았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쌀자루를 채우기 위해서 기도를 드리지만 오히려 이 무신론자는 무거운 쌀자루를 비우고 내려놓기 위해서 그리고 방안을 물건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혼으로 채우기 위해서 기도를 올렸던 겁니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배우는 것의 기쁨이며 즐거움이었지만 성서의 첫 장은 창조하는 것의 기쁨이며 그 즐거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죽음은 손에 잡히는 모든 것과 그 관계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지요. 색채가 있는 것 형태가 있는 것. 숨 쉬는 것. 이 모든 것들을 아무리 힘껏 잡아도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모래 같은 것이지요.
메멘토 모리는 나와 나 아닌 사람. 그리고 나와 나 아닌 사물들과의 거리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여전히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란 텔레비전 앞에 앉으셔서 저녁 뉴스시간마다 아나운서와 인사를 나누시고 말을 건네는 외로운 나의 아버지와 다를 것이 없었지요. 남들이 망령 났다고 수근대던 그런 아버지 그래서 분노의 목소리로 아버지 대신 큰 소리로 이 바보들아 라고 외치고 싶었던 그런 마음으로 나는 예수님을 보게 된 것이지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빈 것을 견디지 못하지요. 그래서 무엇인가 의미로 채우려고 기를 씁니다. 일기를 쓴다는 것, 그것도 결국 빈 종이의 하얀 공백을 문자로, 의미로 메워가는 행위일 것입니다.

에이허브 선장이 흰 고래 모비딕을 죽이기 위해 평생 목숨 걸고 쫓아다닌 것은 작가가 원고지의 흰 공백을 죽이기 위해 일생 동안 글을 써 나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평한 사람이 있습니다.

살찐 자와 야윈 자의 편을 가르며 세상을 두 쪽 난 칸막이로 바라보았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아직 크리스천은 아니지만 조금씩 낙타가 어디로 향해야 되는지를 공부하고 있지요. 최근 교토생활, 저에게는 사막처럼 외로운 그 생활 속에서 니체와는 또 다른 사막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사자가 되고 초인이 되어 돌아온 것이 아니라 나약하고 비겁하고 욕심많은 지방덩어리로서의 자신을 보았던 것이지요.

신념은 때로는 저를 광기에 몰아넣을지 모른다는 것 떄문에 니체도 예수님도 다 같이 믿지 않은 사람이 된 것이지요.

우리는 만두를 먹을 때 껍질 따로 만두속 따로 먹지 않습니다. 통째로 입안에 넣고 씹어 먹습니다. 그동안 나는 만두 껍질 벗겨 먹고 속을 먹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 속 하나하나의 재료를 구분해서 그 하나하나의 맛을 분석해서 먹으려 헀지요. 삶은 맛을 잃고 영원히 복합적인 만두속의 맛을 제대로 씹지 못한 채 평생을 허송했다고나 할까요.

사랑을 받는다고 합니다. 사랑을 준다고 합니다. 인간의 삶은 주고받는 삶입니다. 그런데 주고받는 그 주체와 객체 사이에는 아무리 다가서도 얇은 빈틈이 생깁니다 전위적인 화가 마르셀 뒤샹은 그것을 앵프라맹스inframince라고 불렀습니다.

문화는 만인이 고루 누리는 보편적인 것인가, 풍토와 문화에 따라서 상대적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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