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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밑줄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알랭 드 보통

두 사람은 똑같은 기대를 안고 사귀어야 해요. 서로 똑같이 줄 준비가 된 상태에서 말이에요. 한쪽은 그저 한번 즐기고 싶어하고 다른 쪽은 진정한 사랑을 원하면 안 된다는 거죠. 거기서 모든 괴로움이 생기는 것 같아요.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둘 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것은 상대가 따분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매력적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둘 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따분한 사람은 나 자신이 되고 만다.


그러나 내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클로이는 마음이 편치 않았을 수도 있다. 생각이란 판단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일에 집중했던 것은 아마도 사랑을 받는 것보다는 사랑을 하는 것이 언제나 덜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며, 큐피드의 화살을 맞기보다는 쏘는 것이,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쉽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관계에는 보통 마르크스주의적인 순간이 있다. 사랑이 보답을 받는 것이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론가들이 말하듯이,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몸을 분리하고 있는 살갗은 단지 육체적 경계일 뿐만 아니라, 더 깊은 심리적 분수령-넘어가려고 하는 것은 바보짓일 뿐이다-을 드러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위협적인 차이는 중요한 점에서 쌓여가는 것이 아니라, 취향과 의견이라는 사소한 점에서 쌓여갔다.


어쩌면 그 순간 나는 내가 앞으로 클로이에게서 발견할 모든 차이를 생각하며, 그녀는 그녀고 나는 나일 그 모든 시간, 우리의 세계관이 양립할 수 없는 시간을 생각하며 두려움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차이를 농담으로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일 수도 있다.


고전적으로 아름다운 여자는 남자에게 상상력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문제가 언어에서 생겨날 수 있듯이, 좋은 것들이 언어에 의해서 파괴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랑은 결국 나비 가운데 드문 색깔을 가진 종과 같아서, 종종 눈에 띄기는 하지만 결코 결정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때부터 사랑은, 적어도 클로이와 나에게는, 이제 단순히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입에서 맛있게 녹는, 지름 몇 밀리미터의 달콤하고 말캉말캉한 물체였다.


나는 윌의 질문 덕분에 한 삶에게 속해 있는 특질과 연인이 그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특질 사이의 차이를 깨닫게 되었다. 윌은 신중하게도 클로이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지 않고, 더 정확하게 내가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느냐고 물었다.


나는 몸 때문에 클로이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본질에 희망을 품게 해주었기 때문에 그 몸을 사랑했다.


실체의 속성 한 가지를 실체 자체로 대체해버린 것은 아닐까?



생존의 문제가 아닐 때에는 의심도 쉽다. 우리는 여유가 있는 만큼만 회의적일 수 있으며, 따라서 근본적으로 우리를 지탱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회의를 품는 것이 무척 쉽다.


클로이와 내가 사랑의 노른자위를 말짱하게 보존할 수만 있다면, 진실이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공유된 경험 속에서 친밀성은 자라날 기회를 얻는다. 그저 이따금씩 식사를 함께 하면서 생긴 우정은 결코 여행이나 대학에서 형성된 우정의 깊이를 따라갈 수 없다.


그러한 일화들 자체가 흥미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클로이와 나만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일화들과 관련된 부수적인 연상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라이트모티프들은 중요했다. 그것이 우리에게 우리가 서로에게 남이 아니라는 느낌을 주었고, 일들을 함께 겪어가며 산다는 느낌을 주었으며, 함께 끌어낸 의미를 기억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다른사람들과 누리는 행복은 두 가지 종류의 과잉에 의해 제한이 되는 것 같다. 하나는 질식이고 또 하나는 외로움이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자신에 대한 느낌은 달라진다. 우리는 조금씩 남들이 우리라고 생각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그녀는 결국 다른 인간일 뿐이었으며 그 말이 가지는 모든 신비와 거리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랑의 이야기의 가능성과 마주치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은 가능한 수많은 삶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쩌면 우리가 슬픔에 빠지는 것은 그 삶들을 다 살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택을 할 필요가 없는 시간, 모든 선택에 따르는 불가피한 상실로 인한 아쉬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갈망이 생긴다.


또다른 중국 음식점에서, 나느 다른 사람들과 만는 것은 식탁 중앙에서 회전하는 원반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우리는 인간 감정의 고정성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현실에서는, 불과 하루 동안에도 나는 먹을 수 있는 감정의 요리를 모조리 빙글빙글 돌려가며 내 내부의 접시에 올려 놓는다.


성숙이란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받을 만한 것을 받을 만할 때에 주는 능력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또 자신에게 속하고 또 거기서 끝내야 할 감정과 나중에 나타난 죄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촉발시킨 사람에게 즉시 표현해야 할 감정을 구분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많은 부분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행복의 순간에) 현재를 살지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평생 갈망해온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깨달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싫어한다, 이것은 나는 이런 식으로 너를 사랑하는 위험을 무릅쓸 수박에 없다는 것이 싫다는 근본적인 주장과 통한다. 


"너를 이런 식으로 미워할 수 있다는 게 기분 좋아. 네가 이것을 받아들이니까 마음이 높여. 내가 너한테 꺼지라고 말히면 너는 나한테 무러 집어던지기는 하지만 떠나지는 않거든. 그게 안심이 돼."


그는(무하마드 2세) 하렘의 한 아내를 사랑하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자 즉시 그녀를 죽이게 했다. 다른 사람에게 영적으로 종속되어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 답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더 무시무시한 의문이 있다. 그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 것이냐 하는 의문이다. 이것은 마치 건강과 힘이 충만한 상태에서 자신의 죽음을 상상해보려는 것과 같다. 사랑의 종말과 삶의 종말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후자의 경우에는 그래도 죽음 뒤에는 우리가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위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계의 끝이 반드시 사랑의 끝은 아니며, 더군다나 삶의 끝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아는 연인에게는 그런 위안이 없다.


속성이나 특질을 넘어선 존재론적 자위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이다.


어쩌면 비행기표를 사느냐 마느냐의 문제보다는 어떤 비행기표를 사느냐 하는 문제가 더 다루기 쉬웠기 떄문에 여행을 가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떤 사람이 사랑을 한다거나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 사람의 선택, 따라서 책임을 넘어선 일이기 떄문이다.


햄릿에 대한 내 대답은 사는 동시에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를 파악하는 것과 문제를 해결하는 것, 지혜와 지혜로운 인생은 크게 다르다.


금욕주의자가 아무리 용감하다 할지라도 최고의 현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점, 즉 사랑의 순간에는 결국 겁쟁이에 불과했다.


나는 좀더 복잡한 교훈을 끌어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의 모순들에 부응할 수 있는 교훈, 지혜에 대한 요구를 지혜가 무력해지는 상황과 조화시킬 수 있고, 첫눈에 반하는 것의 어리석음을 그 불가피성과 조화시킬 수 있는 교훈. 사랑을 평가할 때에는 교조적 낭만주의나 비관주의로 달아나지 말아야 하고, 두려움의 철학이나 실망의 윤리학을 구축하지 말아야 했다. 사랑은 분석적 정신에게 겸손을 가르쳤다. 아무리 확고부동한 확실성에 이르려고 몸부림을 쳐도 분석에는 절대로 결함이 없을 수 없다는 교훈, 따라서 아이러니로부터 절대로 멀리 벗어날 수가 없다는 교훈을 가르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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