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밑줄
상처 없는 영혼/공지영
Inframince
2010. 11. 12. 03:31
모든 소리들이 잦아지고 그 자리에 시계 소리가 들어섭니다. 내가 아무리 몸부림친다 한들, 시계는 언제나 한 번에 한 걸음밖에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쩌면 저 시계의 한 걸음이 영원을 향해 떠나는 첫걸음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더 이상의 아무 인연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헤어짐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 해도 만남은 피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까닭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우리가 이미 만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리석은 나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글쎄요, 함께 있다는 것의 소중함은 문득문득 깨달아지는 것이 진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늘 의식하고 늘 바라보고 늘 기다리는 그런 것들은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는 너무나 피곤한 것들이라는 생각, 있는 듯 없는 듯 그렇지만 어느 순간 바라보면 거기 그 자리에 서 있는 그 존재, 그래서 등이 따뜻해지는 그런 존재.......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이 바다만 바라보다가 눈이 멀어버린 사람같이만 느껴집니다. 눈멀기 전에, 바다를 바라보는 것을 그만 그치고 나는 그저 여기서 나의 일상을 담담하게 이어나가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도 바다는 늘 저기 있는데......하는 믿음이 제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언제나 내 손가락 사이를 우수수 빠져나가버릴 것 같은 공포가 언제나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마음이 아픈...... 내게는 지옥만 같았던 시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다의 잘못은 아닙니다.
왜 이들이 그 윤이 나고 찰진 아끼바리 쌀로 밥을 하고도 그 밥을 그대로 먹지 않는지 나는 사실 의아했습니다. 끊임없이 초를 치고 간장을 묻히고 색색가지 고물을 뿌려대는 이들. 이제 그것을 이해할 것만 같습니다. 이들에게 자연이란 자연스러운 위험을 초래할 뿐인 것이 아니었을까요. 쏟아져 내리는 폭우와 지진, 그리고 해일....... 그러므로 자연이 위해를 가하기 전에 인공적으로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던 것은 아닐까요. 자연이 밥을 쉬어서 못쓰게 만들어놓기 전에 초를 뿌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가요? 인공은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미덕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미덕이 되듯이 말입니다.
가게 앞에 세워진 자동 인형이 아무리 웃으며 인사를 한다고 해도 그것을 보고 친절하다고 말하지 않듯이 이들의 웃음과 친절, 그리고 끊임없는 인사말은 그저 습관일 뿐인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상처입는다는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만이 상처입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토록 잘 알고 또 되뇌이면서 한 걸음을 내딛기가 이렇게 힘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사람은 함께한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그들이 만나고 있을 때 각자가 살아온 - 진정으로 살아온 - 햇수가 덧붙여진 만큼 함께하는 거라는 걸 나이가 들면서 저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에게 익숙해진다는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로 지나간 삶을 이해하고 그것에 맞추어 이제 친구가 되려고 한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언제나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가만히 있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면 마치 자전거를 타고 길을 달리면서 작은 언덕길을 오르락내리락하는 느낌입니다. 제가 좀 성숙했다는 유일한 증거가 있다면 이제는 오르막의 힘든 길을 오르면서도 아마 내리막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네까짓 게 뭔데......내 고민을 알기나 알아 하는 오만도 사라지더군요. 글쎄요, 그것은 오만이었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오만이라기보다 서글픔에 가까웠을 겁니다. 이제 이 세상의 누구도 믿지 않겠다던, 결코 내 힘으로는 가 닿지 못할 소망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누군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불행한 것은 바로 게으름 때문이라고요....... 진실과 마주 서지 않으려는 회피, 정직하게 거울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이마와 자신의 코와 자신의 입술을 정면으로 바라보려 하지 않는 게으름이 바로 더 큰 불행을 초래한다고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거울을 보면서 하루에 열두 번도 더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저는 정작 저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제가 본 것은 대체 누구였을까요.
그것이 어떤 이든 한 인간의 마음속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누구에게서든 아직도 숯불처럼 지글거리며 빨갛게 타오르는 상처들과 만날 수 있습니다.
상처도 힘이 된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으며 저는 창박을 바라봅니다. 어두운 창밖에 제 얼굴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언제나 평온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감정의 기복이 조금씩 줄어들고, 이 언덕이 끝나면 평지가 나올 거라는 믿음이 내게서 조금씩 자라나고 있으며 하나를 포기하는 것은 하나를 얻는 것이고,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가 이미 스스로를 가져다놓았다는 인식이 들었습니다.
초밥이 그토록 맛있는 이 일본에서 그 가짜 소시지와 단무지를 넣은 김밥을 먹으면서 언니와 나는 즐거워했지요....... 고향이란......이런 것인가요?
빌어먹을, 웬 이렇게 위로해주는 것도 많을까요. 나는, 정작은 하나도 위로받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이제 여행을 마칩니다. 헤어짐은 헤어짐이 아니더군요. 침묵은 침묵이 아니며, 말은 말이 아니더군요....... 그동안의 나는 침묵은 그저 무일 뿐, 아무것도 전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얼마나 초조한 나날들을 보냈는지요. 헤어짐은 내 살점을 찢어놓는 것처럼 느껴졌지요......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그토록 뱉어놓고 부끄러움 때문에 거리를 걸으면서 토할 것만 같은 시간들도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또 생각해본다. 하찾은 강아지 한 마리를 걱정하던 마음은 내게서도 사라져버린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혼자만 따뜻한 집에서 사는 걸 미안해하던 마음, 강아지를 위해 울던 그 마음을 이제 강아지보다 더 귀한 사람들에게는 1백분의 일도 쏟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그러니 깨어지면서야 우리는 비로소 소리를 내고 저 자신의 존재를 타인에게 알리는 것은 아닐까.
그런 시간들이 있어서, 그런 기다림이 있어서 사람들은 상처투성이 고달픈 삶의 또 한 고비를 넘어갈 힘을 얻는 것이 아닌지.
자기가 아궁이인 줄 모르는 아궁이
사실 지금 돌이켜봐도 그건 솔직한 대답이었지만, 솔직해진다는 것이 언제나 옳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 겨우 깨달은 나는 서른네 살짜리 늦깎이였다.
조금 유명해진 작가라는 것, 간부를 맡고 있는 학생이라는 것을 내가 너무 의식했다면 아마도 나는 몹시 우스운 사람이 되어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것을 그런 식으로 전적으로 무시한 것도 역시 우스운 일이라는 것을 그 아궁이 가에서 나는 깨달은 것이었다.
산다는 것은, 그것도 잘 산다는 것은, 전적인 사로잡힘과 전적인 무시가 아닌, 그 사이의 적당한, 차마 말로는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아슬아슬한 선택의 연속이라는 것을 나는 그제야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때 내가 중산층 가정의 막내딸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누릴 것 다 누려보고 자랐다는 사실 때문에 더할 수 없이 괴로웠단다. 그것은 내 이마에 새겨진 표지 같았지.
그래, 바로 자신을 파괴하는 무서운 힘에 나는 시달린 적이 있었단다. 그 말의 무서운 의미를 너는 이해했다.
자존심이라는 것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꾸며내는 것이 아니란다. 그래, 갈 테면 가라고, 소중한 것에게 소리치는 것이 아니란다. 자존심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고, 그것을 그대로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것이란다. 왜냐하면 네가 원한 것은 그가 떠나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너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힘을 가진 인간은 오직 너 자신뿐이란다....... 너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서 결국 그를 떠나보낸 너 자신에게서 상처입은 것이란다.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맡기고, 생이 너에게 충분히 허락해서 익히고 있는 일들을, 그것이 익기 전에 따버림으로써 훼손시키지 말도록 하자....... 그래......때로는 체념할 줄 하는 인간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래서 시지프스와 정말 다른 점은 시지프스의 고통은 몇천 년 동안 이해받고 있지만 이런 내 고통은, 그것을 고통이라고 느끼는 것에조차 내가 다시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산다는 것 자체가 인생의 명제가 되는 그런 여자인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폭력에 분노하는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잇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녀에게 나타난 가장 건강한 마음은 불행히도 자신의 남편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라고 명령하게 된다.
나는 내 육체를 왜 그토록 하찮게 생각하는 법을 배웠는지....... 내용이 중요하고 형식이 중요하든이 영혼도 중요하고 육체도 중요하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남자들은 '미안하다'는 말을 너무 인색하게 쓰고 있고, 여자들은 쓸데없이 '결국은 내 잘못이다'라는 말을 너무 많이 쓰고 있는 것이 보통의 일이었고, 그 부부도 예외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사람에게는 불꽃같이 타오르는 사랑도 필요하겠지만, 커피향처럼 은은히 퍼지는 우정도 너무나 소중하니까 말이다.
삶이란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귀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는, 더 많은 친구들과 따뜻한 우정을 나누고 싶은 소망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빈민촌에서 빈민답지 않게 산다는 것, 어떤 장소에서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 그럴 때마다 소름처럼 돋는 기억과 나는 다시 마주쳐버렸던 것이다.
책 속에는 나처럼 따돌려져 내내 술래가 되어야 하는 주인공들이 많이도 있었다.
저는 소설을 쓰는 후배들에게 이야기하곤 합니다. 열심히 하는 것이 99퍼센트, 나머지 0.7퍼센트는 고전을 읽는 것, 그 나머지 0.3퍼센트는 소설을 쓸 수 있는 건강, 지구력, 그리고 용기라고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