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짧은 감상
제정 러시아의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등장하는데, 가끔 등장하는 사람들은 나의 모습과도 비슷한 부분이 있다. 네흘류도프는 양심이 마비되어 일상을 영위하는, 후에 그 자신이 묘사하는 다수의 희생으로 편의를 누리는 소수의 귀족 중 하나인데, 결국 부활이란 그 양심의 부활이다. 네흘류도프가 묻어두었던 과거를 뜻밖에 맞닥뜨리고 끊임없이 번민하는데, 순간순간의 안락과 감정, 타인의 견해에 흔들리는 마음이 너무도 인간적이다.
각각의 인물들이 자기의 생각, 자기의 생활을 합리화하게 된다는 대목이 나에게도 뼈아프다. 자기에게는 관대해지는 반면 타인에게는 엄정해진다.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토지는 소유해서 안 된다는 주장이나(공산주의가 이 시절에 이미 있었구나), 종교에 대한 이야기들을 보면 좀 이상적이지 않은가 생각은 든다. 그리고 후반부로 갈수록 어떤 사랑 이야기라기보단 톨스토이 자신의 견해를 네흘류도프를 통해 피력하는 것 같은 양상이다. 결말부의 네흘류도프의 깨달음(?) 역시 다분히 기독교적인 기반에서 나타난다.
비참하고 억울한 죄수들의 사연들을 읽어가다 보면 인권이라는 개념이 형성된 것도 오래지 않았구나 싶다. 이 책이 쓰여진 배경이 대략 1800년대 후반이니 100년 조금 더 전일 뿐인데. 톨스토이는 결국 러시아의 사법체제, 토지 제도를 위시한 다양한 사회구조, 종교 등을 전부 다 까고 있고, 거기에서 기독교적 '사랑'에 기반한 인권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역자 후기를 읽어보니 당시에 잡지에 연재를 했었는데 당국의 검열로 많이 짤렸다고 한다. 그래도 연재를 했다는 걸 보면 오히려 의외인 것 같기도 한데 당시 분위기가 어땠는지 모르니 판단하기 어렵다.
너무 길어서 읽기가 좀 망설여지기는 했었는데 무엇보다도 이야기가 재미있다. 번역은 번역이라서 문장들이 썩 매끄럽지 않은 부분도 많지만, 이야기 자체는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여기저기 가지를 치는 식이라 지루해지기 쉬울 것 같은데도 읽다 보면 빠져들었다.
아쉬운 점은 이야기가 명확하게 완결된 느낌이 안 든다. 중간에 급하게 끊어버린 것 같기도 하고, 감당이 안되게 이야기가 커져서 자른 것 같기도 하고...
밑줄
그녀가 술에 끌린 것은 비단 술맛을 알게 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술이 그녀가 겪은 쓰라린 과거를 전부 잊게 하고, 술을 마시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마음의 안정과 자기 존엄에 대한 자신을 갖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술기운이 없을 때는 항상 우울한 수치감을 느꼈다.
혈기 왕성했던 시절과 같은 굳은 신념도 그런 결단성도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는 허영 섞인 희망도 이제는 모두 사라지고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 이 점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가정과 자식들이 무의미한 자신의 현재 생활에 어떤 의의를 부여해줄 수 있으리라고 그는 기대했다.
그는 무척 허영심이 강한 인간이라 반드시 입신출세하고야 말겠다고 굳게 결심한 바 있었으므로, 무슨 사건이든 자기가 논고를 맡은 사건은 모두 유죄로 판결이 내려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신이 창조한 이 세상이 신비롭게만 여겨져 기쁨과 감격으로써 그 신비를 풀어보려고 노력했었으나, 지금의 그에게 인생의 모둔 것은 단순 명료했으며 자기가 처한 생활환경에 따라 규정되었다.
자신을 믿고 생활하려면 안이한 쾌락을 좇는 동물적 자아를 만족시키는 방향에서기 아니라, 그와 정반대되는 방향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믿고 생활하면 항상 남의 비판을 받아야 하지만, 남을 믿고 있으면 주위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었다.
대체로 군대 근무라는 것은 인간을 타락시킨다. 왜냐하면 군에 복무하는 사람들을 완전한 무위와 나태의 상태, 즉 유익한 지적 행동이 결여된 상태로 끌어넣어 일반적인 인간의 의무에서 해방시키는 대신에 연대니 군복이니 군기니 하는 명예만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또한 누군가에게는 무한한 권력을 부여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노예적 복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모두 그렇게 하고 있으니 나도 그러는 게 당연하다.
재판장 자신도 빨리 끝마치고 싶었고 벌써 스위스 여자가 기다리고 있을 시각이었는데도, 그는 자기 직무에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일단 입을 연 이상 지껄이는 것을 중단할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의 처지는 마치 방 안에서 똥을 쌌다고 해서 주인에게 목덜미를 잡혀 자기가 싸놓은 오물 속에 콧등을 틀어박히는 강아지와 똑같다고 생각되었다.
순간 네흘류도프의 마음속에는 좋지 않은 감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는 그녀가 무죄로 석방되어 이 도시에서 그냥 살게 될 경우를 예상했으므로 그녀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징역과 시베리아 유형은 그녀에 대해 어떤 태도든 취해야 하는 가능성을 한꺼번에 제거해준다. 숨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새는 사냥 주머니 속에서 푸덕거리면서 마침내 자신의 존재를 상기시키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어리석고 공허한, 아무 목적도 없는 무가치한 생활의 굴레 속에 사방팔방으로 얽매여 있는 자기 자신을 느꼈다.
그들을 속일 수는 있어도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렇게까지 그가 더러워진 적은, 양심이 요구하는 것과 실지로 하는 생활 사이에 이렇게까지 커다란 차이가 생긴 적은 여태껏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그 무서운 밤부터 신이나 선이란 것을 믿지 않게 되었다.
...
그녀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여자는 그녀를 이용해서 돈을 벌려 했고 남자는 늙은 서장에서 감옥 간수에 이르기까지 그녀를 쾌락의 대상으로밖에는 보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이 세상에는 쾌락 말고는, 바로 이 쾌락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제가 꺼내다가 여러 사람들에게 입 맞추게 한, 끝에 칠보 메달이 달린 도금 십자가는 지금 여기서 그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 같은 일을 금한 까닭으로 그리스도가 못 박혀 죽은 그 형구를 본뜬 것에 지나지 않는데도 누구 하나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네흘류도프는 첫 번째 면회 때부터 카튜샤가 자신을 보고 그녀에게 봉사하려는 자신의 결심과 후회를 알고 나면 기꺼이 감동해서 예전의 카튜샤로 돌아와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전의 카튜샤는 이미 사라지고 다만 마슬로바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누구든지 일을 하려면 그 일이 소중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인간은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반드시 대개는 자신의 행동이 소중하고 훌륭하다고 생각될 수 있도록 스스로의 인생관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괴로운 나머지 증오에 사로잡힌 채 무턱대고 떠나버린 옛날의 그 세계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이렇게 자문해보았으나, 역시 세상 사람들의 이목이 그의 결심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점점 이러한 상태에 익숙해져서 그들 자신도 스스로의 공포를 모르고 또 그것을 호소하지도 않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도 이러한 현상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당연한 것같이 믿고 있다.
농민이 궁핍해진 전적인 원인, 아니 적어도 그 궁핌의 중요하고도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그들을 먹여 살리는 땅이 그들의 수중에 있지 않고, 토지에 대한 권리를 이용해 농민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수중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지극히 명료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문제는 아무리 애써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남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답이 나온다는 점이었다.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 곧 조물주의 섭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내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내 양심에 새겨진 조물주의 의지를 행하는 것은 내 힘으로 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것을 해낼 때 내 마음은 확실히 평안하다.
사람들은 하필 아픈 곳을 찔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아픈 곳을 찔렸을 때만 유독 그 아픔을 더 느끼는 데 지나지 않는다.
당시에도 막연히 느끼고는 있었으나 굳이 눈을 감고 외면하려던 그 생활의 온갖 공포가 생생히 떠올랐던 것이다.
그것은 소수의 편의와 만족을 위해 몇백만 명이 받고 있는 고통이 갖가지 수단으로 숨겨진 사회다. 그리고 이 사회의 사람들은 이러한 고통을 보지도 않고 또 볼 수도 없기 때문에 자연히 자기네 생활이 얼마나 잔인하고 죄악에 차 있는가를 모르고 있다.
그리고 특히 지금 현재 그의 유일한 관심사라고 할 수 있는 마슬로바를 비롯해 그가 돕고자 하는 고통받는 여러 사람들을 구해내려면, 존경은커녕 왕왕 혐오와 경멸을 느끼게 하는 그 사회 사람들에게 아무래도 원조와 호의를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행동하면서 그는 자신의 체면을 유지해가고 자가당착을 노출하지 않는 데에만 노력해왔다.
동시에 그는 감옥에서 만난, 역시 살인을 해서 유형을 선고받은 젊은 미남 죄수와 결투로 상대를 죽인 장교를 자기도 모르게 비교해보았다. 술 때문에 살인을 하게 된 것은 두 사람이 똑같았다. 그런데 농부인 한 사람은 격분한 순간 살인을 저질러 아내와 자식, 그리고 친척과도 헤어져 족쇄를 차고 머리를 박박 깎여 유형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영창 안의 깨끗한 방에서 맛잇는 식사를 하고 좋은 술을 마시고 책을 읽으며, 머잖아 석방되어 전과 같은 생활을 하고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시키는 일을 모두 양심적으로 정확히 정리해갔는데도 그는 이 근무를 통해 사람들에게 유익한 인간이 되고 싶다는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으며, 마땅히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의식을 심중에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관청 근무 당시보다도 한층 강하게 그는 '잘못된 것'임을 느꼈지만, 동시에 한편으로 이번 일로 그에게 커다란 만족을 주었으리라고 믿고 있는 여러 사람들을 낙심시키지 않으려고 이 임명을 거절하지 못했고, 또 한편으로 이 임명은 그의 본성에 있는 저속한 분자를 기분 좋게 간질이기도 했다.
이런 읫기에 참석하는 한 그는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듯한 시늉을 한다든가(몸에 밴 정직한 성질로 보아서는 절대 안 될 일이었다), 또는 이런 모든 표면적 형식을 허위로 인정하고 거기에 참가할 필요가 없도록 자기 생활을 뜯어고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조그만 허위였지만, 지금 그가 빠져 허덕이고 있는 커다란 허위 속으로 그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신과 인간을 믿고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믿었던 사람이라도 그런 일을 겪은 뒤에는 믿는 것을 그만둘 테니까요. 저는 그때부터 인간을 믿지 않게 되었어요. 성질도 고약해지고요.
자신이 지지하는 종교에 대해서 그가 갖는 태도는 마치 썩은 고기로 닭을 기르는 야계자 ㅇ주인의 태도와 같았다. 썩은 고기는 아주 불쾌하지만 닭이 잘 먹기 때문에 그것을 먹여 키우는 것이다.
그러자 네흘류도프의 마음에는 이들 모두가 체포되고 감금되고 유형 보내진 것은 결코 이 사람들이 정의를 문란케 하거나 불법 행위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오로지 관원이나 부자들이 민중에게서 거두어들인 재산을 간직하는 데 이 사람들이 방해가 되었기 때문일 뿐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정의, 선, 법률, 신앙, 신에 관한 그러한 모든 말이 단순한 말에 지나지 않고 가장 야비하고 탐욕스러운 잔인성을 가지고 있다니, 그럴 수가 있을까?
'인간 속에 있는 야수성은 흉악한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 그 야수성이 그대로의 모양으로 나타날 때, 인간은 높은 정신적 차원에서 굽어보고 멸시하기 때문에 타락하거나 안 하거나 간에 이전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야수성이 겉치레만의 미덕이고 시적인 감정의 껍데기를 쓰고 타인의 존경을 요구하게 되면, 인간은 그 야수성을 숭상하여 온통 빠져버려서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정말 무서운 일이다.'
미국에 노예제도가 있던 시기에 소로는, 노예제도가 합법적으로 보호되고 있는 나라에서 성실한 시민이 몸을 둘 유일한 장소는 감옥뿐이라고 말했다. 네흘류도프는 페테르부르크에서 모든 것을 알고 난 뒤에 이와 똑같은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나는 심한 고통과 동시에 커다란 기쁨을 경험했다. 오늘 병원에서 그녀의 행실이 나쁘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이렇게 못 견디게 괴로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가 말할 때도 혐오와 증오의 감정을 금할 길 없었지만, 다음 순간 문득 나 자신의 일을 상기하고는 과거에 수없이 죄를 저질러 왔으며 현재도 마음속으로 그녀를 증오함으로써 죄를 짓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나 자신이 미워지는 동시에 그녀가 측은해졌다. 나는 곧 마음이 가벼워졌다. 자기 자신의 흠을 항상 제때 발견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더 좋은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은 모두' 하고 네흘류도프는 다시금 생각했다. '지사라든지, 소장이라든지, 경찰이라든지, 순경이라든지 하는 자들이 인간에 대해서 인간적인 태도로 대할 필요가 없는 경우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앞의 인간을 보지 않고, 또 인간에 대한 자기의 의무를 보지 않고 다만 자기의 직무와 그 요구만을 중대시하며 그것을 인간관계의 요구보다 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는 이 한 가지에 있다.
'아마도 지사니, 소장이니, 순경이니 하는 사람들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중요한 특징, 서로에 대한 사랑과 동정을 잃은 인간을 보기란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까지는 자신의 사상으로, 또 어느 정도까지는 타인의 사상으로 생활하고 행동하다. 어느 정도까지 자기 사상으로 생활하고 어느 정도까지 타인의 사상에 의뢰하느냐 하는 점에 인간의 주요한 한 가지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독신자는 이 백혈구 같은 존재로서, 그 사명은 유기체의 약한 분자나 병든 분자를 도와주는 데 있다는 것이다.
어딘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몇몇 인간이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별의별 타락과 비인간적 모욕과 고통을 주고 있음을 말로 듣고 아는 것과, 석 달 동안이나 끊임없이 몇몇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굴욕과 고통을 주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는 것은 크나큰 차이가 있다.
아래로는 법정 정리에서 위로는 대신에 이르기까지 모든 법관이나 사법관료들은 입으로는 정의와 민중의 행복을 떠들면서 실제로는 그런 데 아무런 관심도 없고, 오직 이 같은 고통이나 타락을 초래하는 일을 하는 데 지불되는 매달의 봉급이 필요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대낮같이 명백하다.
그녀는 네흘류도프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를 언제까지나 옭아맴으로써 그의 일생을 망치기보다는 시몬손과 함께 그의 곁을 떠남으로써 그를 해방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자기 희망대로 실행한 것을 기뻐했지만, 동시에 그와 헤어지는 것을 슬퍼하고 있었다.
"사람은 자기 일만 하면 되는 거야. 남의 일에 참견할 것 없어. 자기는 자기고 남은 남이니까. 누구를 벌하고 누구를 용서할지 아는 분은 하나님이지, 우리가 아니야."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 사악함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단 하나의 확실한 길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고 인식하고, 따라서 남을 벌하고나 교정할 만한 힘이 자기에게는 절대로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 있음을 그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이제야 네흘류도프는 사회와 질서가 존속하고 있는 것은 남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이들 합법화된 범죄인들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부패와 타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이 서로 돌보며 서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뚜렷이 깨달았다.